
봉선화
단명
“나, 이거 그냥 안 하면 안 돼?”
“안돼.”
유단의 질문을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동자삼 소녀는 너무나도 손쉽게 뿌리쳤다.
곁에서 난감한 표정을 한 채 지켜보고 있던 동자삼 소년이 누나 몰래 유단에게 사과했다.
한참 만에야 작업을 끝마친 채설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단의 표정은 더욱 나빠졌다.
“이거 이제 풀지 말고 가만있어.”
유단은 제 손에 묶인 헝겊과 실을 들여다보다가 채설을 돌아보았다. 채설은 자신의 작품에 혹시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작은 손으로 유단의 손을 꼭 붙잡고 살펴보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풀면 안 돼.”
“그게 언제까지인데?”
“저녁 먹을 때까지?”
“그렇게 오래?!”
아직 밖에는 해가 쨍쨍했다. 유단의 표정을 본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밤새 묶어두는 거야. 밤새 있을래?”
“……저녁 먹을 때까지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응! 저녁 먹기 전에 풀어줄게.”
뒷정리를 한다며 남동생을 이끌고 총총히 걸어가 버리는 채설의 뒷모습을 보며 유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봉선화 물을 들이게 된 것은 유단의 본의가 아니었다.
초여름마다 앓아눕던 유단이 겨우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원 한쪽을 차지한 봉선화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매년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저거 봉선화 맞지?”
정원을 관리하는 쌍둥이들에게 묻자 채설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유단이 봉선화도 알아?”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채설은 대답도 하지 않고 봉선화 꽃잎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봤다고 갑자기 막 뜯어?”
“어디다 쓰는 건지 가르쳐주려고.”
“무슨 약인데?”
“봉선화꽃이면 역시 물들이는 거지.”
“난 물들이고 싶다는 게 아니었는데.”
채설은 유단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이것저것 챙겨오더니 작은 그릇에 정체불명의 흰색 가루와 함께 꽃잎을 으깨기 시작했다. 풀냄새와 함께 새빨간 즙이 흘러나왔다. 잔뜩 짓이겨진 꽃 이파리를 강제로 손끝에 올리고 비닐로 돌돌 말더니 실로 묶는 것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양 손가락 끝을 모두 묶어두었으니 다른 요괴들의 일을 돕기는커녕 핸드폰이나 노트북조차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아무 쓸모가 없다며 흑요에게서 쫓겨난 유단은 마당이나 내다보며 허송세월할 수밖에 없었다.
비닐로 돌돌 싸매진 열 손가락 끝은 안에서 무슨 꼴이 되어있을지 불안했다. 하지만 잘못 움직여서 풀리기라도 하면 닥칠 동자삼 소녀의 분노가 무서워서 유단은 그냥 손가락을 가지런히 앞으로 쭉 내민 채 가만히 있었다.
꼼짝하지 않고 가만있으려니 손가락이 굳어지고 아파져 오는 듯했다. 유단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다 풀어 던져버리고 손을 쥐었다 펴고 싶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앉아있어.”
“그건 보면 압니다.”
손가락을 앞으로 쭉 편 채 있는 모습을 기이하게 여긴 백란이 물었다.
“봉선화인가요.”
“난 딱히 손톱을 칠하고 싶다는 게 아닌데 이렇게 해놓고 가버렸어.”
“옛날에는 봉선화 물을 들이는 것에 벽사의 의미가 있어서 병에 걸리지 말라고 남자아이들에게도 해주었지요.”
“……난 어린애도 아닌데?”
백란은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웃으며 유단의 손을 받쳐 들었다
“그런데 그냥 가만있으면 되지 왜 그러고 있으십니까.”
“풀릴까 봐. 그런데 손 아파”
“편하게 있어도 될 텐데요. 너무 신경을 쓰고 있는 거 아닙니까?”
“풀리면 화낼걸….”
유단이 시무룩하게 말하자 백란이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이리저리 주무르기 시작했다.
긴장한 듯 굳어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만지작거리며 백란이 말했다.
“손가락이 완전히 굳었어요. 힘주면 부러지겠네요.”
“안 부러져. 부러뜨리지 마.”
“안 부러뜨립니다.”
백란은 아예 손가락을 꼭꼭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우가 주무르자 저리고 아픈 것이 퍽 나았다.
“조심해. 풀릴라.”
그래서 유단은 잡힌 손을 빼내기는커녕 얌전히 내어주었다.
낮이 긴 탓에 저녁 먹을 때가 되어서도 여전히 하늘이 환했다.
이렇게 묶고서는 밥도 못 먹는다고 얼른 풀어달라는 유단의 주장에 동자삼 쌍둥이와 백란이 달라붙어 각자 몇 개씩 실을 풀어주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 비닐을 풀어낸 손가락 끝은 손톱도, 손가락도 노을처럼 연한 선홍빛 감도는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역시 너무 조금만 해놔서 그런가? 색이 연하네?”
“조금? 이게 조금이야? 난 손가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유단이 손가락을 몇 번씩 쥐었다 피며 말했다.
“그래서 한 건 좋은데 이건 어떻게 지워?”
유단의 물음에 채설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우려고? 아깝게!”
“그렇다고 손톱을 물들이고 다닐 수는 없잖아.”
“지우기 힘듭니다.”
“……나 그러면 이렇게 귤 먹은 것보다 진한 손가락으로 살아야 해?
곁에서 같이 유단의 손을 들여다보던 백란이 웃으며 말했다.
“봉선화로 물들인 건 매니큐어랑은 달라서요.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봉선화 물을 들이면 수술을 앞두고 마취가 잘되지 않는다, 수술 전, 손톱을 뽑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도 있지요.”
“무서워!”
유단이 자기 손을 숨기듯 품에 끌어안고 움츠렸다.
당장 수술할 예정은 없지만,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마취도 없이 손톱을 뽑히는 일이 안 생기리란 법은 없었다.
“고문이야?”
“속설입니다. 실은 마취도 되고 손톱을 뽑지도 않아요. 현대 의학을 믿어보세요.”
“너는 필요 없잖아.”
“그러니까 제가 믿을 필요는 없죠.”
백란이 유단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얼른 와서 저녁 먹으라니까!”
저녁을 차리던 흑요가 아무도 소식이 없자 다가와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각자가 알고 있는 봉선화 물 지우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빙초산을 밀가루 반죽에 섞어서 손톱 위에 올려두면 된다더군.”
“소주를 사용해도 되지. 미성년자니까 마시면 안 된다.”
“안 마셔. 그냥 알코올이면 되는 거 아냐?”
“소금물로 씻어도 괜찮아요.”
“매니큐어를 바르고 아세톤으로 지우는 걸 반복해도 된다더군요.”
갖은 방법이 나왔지만 다 연하게 만드는 방법일 뿐 확실하게 지우는 법은 없었다.
“흐려서 금방 지워질 거야. 진하게 물들여도 첫눈 올 때까지 버티기 힘들던걸.”
“난 첫눈이 아니라 여름 끝나기 전에 지우고 싶은 거야.”
채설의 위로에 다시 한번 자기 손을 들여다본 유단이 단호하게 말했다.
“개학 때까지 다 안 지워지면 어쩌지.”
“연해서 금방 지워질 겁니다.”
따뜻한 물에 손을 담그고 참방거리던 유단을 보며 백란이 물었다.
“아깝지 않나요?”
“시간이?”
“봉선화 물들인 것이 첫눈이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데, 본인은 오히려 지우려고 노력하고 계시는데요.”
“그건 안 아까워.”
백란의 시선이 손에서 얼굴로 올라왔다.
“지워진다고 안 이루어진다는 말은 없었잖아.”
유단의 말에 웃은 백란이 유단의 손을 건져 올렸다.
“손이 다 불고 있어요. 좀 있다가 다른 방법도 해보죠. 매니큐어를 발랐다가 지우는 건 어떤가요.”
수건으로 제 정인의 손을 닦아내며 여우가 즐겁게 말했다.
백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단은 두 번 다시 봉선화 물은 들이지 않겠다며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빛깔이 지워지는 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떤 색이든 몇 번이든 새로운 색을 칠하면 될 일이다.
다음번에는 연한 선홍빛 감도는 주황색이 아니라 다른 색을 올려볼 생각에 여우는 퍽 즐거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