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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놀이

루리아

* 본편과 외전 1부 이후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 단이가 성인입니다.​

* 날짜는 가상으로 4월(음력 3월) 언젠가로 봐주세요.

푸른 하늘에 구름이 물감처럼 유유히 번진다. 옅은 분홍빛 꽃이 흩내리는 봄이었다. 전통 거리에도 봄을 맞아 연인과 거니는 이들이 많은 시기다. 상가에서는 봄맞이 세일 혹은 신 메뉴의 전단을 창가에 붙여놓았다. 누구나 들뜬 기색이 만연한 세상에서 유단은 피곤한 얼굴로 발을 놀리기 바빴다.

 

대학생이 되고 자율적인 시간과 행동이 쥐어지는 게 좋은 일인듯 싶었으나 그만큼 모든 걸 제 손으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책임이 따랐다. 태어나고 자라길 주입식교육으로 살아온 유단은 성인이 되었을 뿐인데 어른 취급을 받고 뭐든 제 알아서 해야 하는 곳에 던져져 당혹스러웠다.

 

모든 게 어설퍼 우왕좌왕 사람과 일정에 휩쓸렸고, 왜 원하는 강의를 듣기 위해서 이 치열한 경쟁 속에 놓여야 하는지.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불평을 삼키며 화면을 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마저도 일찍이 스스로 해오는 것에 익숙해 있던 유단에게 적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가족이 있었고 같이 고민해주는 요괴들도 있어서 혼자 막막한 일은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그러했듯이 유단은 여전히 반월당에 사건을 들고 왔고 과제와 여름병을 해결할 쾌적한 공간쯤으로 쓰고 있었다. 제 소유 부동산이라고 명백히 이름까지 적히고 말았으니 이용에 거리낌이 없었다. 6인요가 먹고 살 매출과 대학등록금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대학은 자기들이 보낼 거라며 외치던 구렁이 요괴와 예전에 뭔가 적던 도씨는 그냥 시늉이 아니었던지 정말로 돈을 보태주긴 했다.

 

매출이 나오지 않아서 간당간당했던 때였다. 그래서 안 받는다고 거절했더니 자신들을 염치없는 요괴로 만들 셈이냐는 쪽으로 말이 튀었다. 흑요와 채설이 진지한 얼굴로 패물을 꺼내오고, 도씨가 골동품을 골라내고 있는 걸 목격한 유단은 죄다 거절했다. 뒤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백란은 홀연히 2층에 올라갔다 내려와 자신이 가진 족자 중 하나를 큰맘 먹고 내놓았다. 그런 문화유산급 물건은 당연히 받을 수 없었다. 이 역시 거절했다. 쌍둥이가 무언가 결심하던 것은 입 밖에 나오기도 전에 백란과 유단에 의해 타파되었다.

 

"너희가 무슨 돈이 있다고 준다 만다야! 안 줘도 괜찮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만에 큰소리를 냈다. 그 말을 들은 요괴들은 아 그래요? 하고 다들 싹 태도를 바꿨다. 내왔던 물건을 갈무리하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르지 않아? 투덜거렸을 땐 가증스럽게도 눈을 동그랗게 뜬 여우가 거절하신 건 그쪽인데요? 라는 답을 해왔다.

 

그게 다 요괴들이 짜고 친 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집에 갔을 때 가방 속에서 처음 보는 봉투 하나가 나왔다. 안에 든 건 몇 달간의 식비 쯤 되는 돈이었다. 봉투 속에는 밥은 챙겨 먹으라고 정갈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곧장 다음날 추궁했지만 자기들은 모르는 돈이라고 잡아뗐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돈 봉투를 받게 된 유단을 보며 요괴들은 작게 웃었다.

 

 

 

 

훈훈하게 마무리 된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가게는 이전에 비해 손님이 훨 늘긴 했으나 여유롭진 못했고 더군다나 현재 반월당의 주인은 유단이었다. 요괴들이 돈에 쩔쩔매는 모습 따위 보기 싫었고, 훗날 아버지 도움 없이 지내려면 지금부터라도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었다.

 

난생 처음 하는 아르바이트는 나름 괜찮게 흘러갔다. 그러다 한 달쯤 되었을까. 반월당에 가야 할 녀석들이 엉뚱히 유단을 찾아왔다. 그런 일이 빈번해지더니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잘렸다. 결국 혈연, 지연, 학연으로 돌고 도는 세상을 따라 유단은 나미아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돈을 벌었다. 가끔 생각 외로 보상금액이 높은 일이 와서 가게 유지비에 보탰다. 기껏 있는 채널에 대학 생활 브이로그로 부수입을 얻는 건 어떠냐는 조언도 들었지만 싫었다. 찬 밥 더운 밥 가린다며 누나에게 한 소리 들었다.

 

냉랭하게 꽂히던 잔소리를 지우려 고개를 털었다. 상가 안쪽으로 들어서면 다른 곳들에 비해 한적한 길목이 나왔다. 음, 오늘도 손님은 없겠네. 골동품 상점 겸 찻집 사장이 된 후 미약하게 쌓아 올린 데이터였다. 이쪽 길목부터 지나는 사람이 없으면 그날은 온종일 한두 명 올까 말까 했다. 유단은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아, 오셨어요?"

"어서 와!"

"안녕."

 

어쩐 일인지 작은 앞뜰에서 뇌정벽력을 빗겨주고 있던 쌍둥이가 반갑게 맞이했다. 간단히 인사를 하며 그쪽을 바라보자 얌전히 빗질을 받던 벽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붕붕 빠른 꼬리짓으로 반가움을 표한다. 뇌정벽력은 유단의 근처로 가려고 발짓을 해보지만 쌍둥이가 가로막았다. 시무룩해졌다. 쓰다듬으러 가기엔 저 털들이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잘 알았다. 다 끝나면 그때 보자.

 

흑요에게 사약 커피를 요청한 유단은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콘센트가 있는 구석 테이블은 거의 지정석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앞자리에는 여우가 미리 앉아있었다. 눈짓으로 알은체하는 것에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유단이 노트북을 꺼내고 충전기를 연결하는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뒤이어 가방에선 참고서가 나온다. 탁, 탁. 한 권씩 쌓여가는 책들에 백란의 시선이 닿는다. 책이라면 뭐든 저러지. 이전에도 여우가 흥미를 보이기에 한 번 빌려주었더니 그 뒤로 종종 저런다. 유단은 아무 말 없이 당장 안 쓸 책을 골라 앞으로 밀어주었다.

 

"저기 유단이 안색을 봐. 이러다 사약 커피가 농담 아니라 사실이 되겠어. 저대로 커피를 마시다 쓰러지면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가게에 들어온 손님들이 그걸 보고 경찰과 구급차를 부르겠지, 우린 모두 조사를 받게 될 거야… 풀려나더라도 고카페인 음료를 달란다고 여러 번 건네준 건 우리잖아. 까마득한 어른이면서 어린애를 말리지 못했다고,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밤마다 죄책감으로 뒤척이겠지. 또 주변엔 사람이 쓰러진 가게라고 소문이 나서 발 길이 끊기고 말 거야."

"누나는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단이 형님이 비록 며칠 야근하고 나온 회사원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긴 하지만 우리도 있고 천호님도 계시잖아. 쓰러지시더라도 금방 조치할 수 있으니 아주 큰 일 나는 일은 없을 거야.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게 미리 바닥에 방석을 깔아두고 유심히 살펴보면 돼. 아, 단이 형님 몰래 커피를 탕약으로 바꿔치기해서 드리자. 둘 다 무척 쓰니 향만 잡아내면 알아차리지 못하실 거야. 누님께 도와달라 하자."

"다 들리거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쌍둥이를 떨떠름하게 돌아보았다. 일전보다 그 비약이 껑충 뛰어올랐다. 나도 커피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으면 좋겠다. 과제를 끝내면 시험이 있고 시험이 끝나면 시험이 있었다. 와중에 제출 기간은 앞당겨지지 않나. 일정이 꼬여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게 단기간 차력쇼와 다를 게 뭐지. 노트북을 보며 골머리를 썩고 있자 시야 구석으로 달칵, 찻잔이 들어섰다.

 

"천호님, 오늘은 목련차를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향이 좋네요."

 

공손한 목소리를 내는 구렁이 요괴와 향을 즐기는 여우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움직여 제 몫으로 내어진 찻잔을 내려다본다. 맑은 수색을 가진 차에서 상쾌한 향이 퍼졌다. 나 커피 주문했을 텐데. 유단이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팔짱을 낀 흑요가 내려다보며 답했다.

 

"네 놈 상판을 보고 있으려니 애들이 안절부절못하지 않느냐. 당분간 커피는 없을 줄 알거라."

 

사약커피 금지를 선언한 구렁이 요괴는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맞은편에 앉은 여우가 태연한 얼굴로 끄덕이기나 한다.

 

"줄이시는 게 맞습니다. 그게 어디 일반 커피에 비교할 수준이겠습니까. 차로 만족하시죠."

"갑자기 건강을 신경 쓰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야?"

"연회가 가까워 그렇습니다. 당일에 쓰러지면 두고 갈 수도 없을 거라서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쓰러지면 그냥 자게 두고 너희끼리 놀다 와. 가게 보고 있을게."

"글쎄요. 저쪽을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올까요."

 

여우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봄에 들뜬 것은 비단 저 밖을 돌아다니는 인간뿐이 아니었다. 점원들도 알게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이고 발걸음이 가볍다 못해 어딘가 박자를 타는 둥, 잔뜩 흥이 난 모양새다. 벌써 마음은 놀러 나갔다. 유단을 포함해 반월당의 모든 이가 함께 가는 첫 꽃놀이라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유단은 다시 백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언제부터 저런 거야. 초청장을 받은 후 부터요. 화류놀이 초청장이 온 건 몇 주 전이었다.

 

 

 

 

 

* * *

 

 

 

 

 

얼핏 따스해 보이지만 바람에 한기가 느껴지는 초봄, 햇빛이 닿은 자리에 온기가 돌았다. 둥근 창에서 쏟아진 빛을 따라 시선을 굴리면 그림 같은 여우가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한다는 게 종이접기라 새삼 우습기도 했다. 이 여우와 사귄 지 2년쯤 되었을까. 기념일 같은 걸 챙기는 성정과는 거리가 먼 탓에 날짜를 헤아려보지 않았으나 거의 그랬을 거다. 누군가 사귀고부터 많이 달라진 게 있는가 질문한다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있었다.

 

유단이 수업을 마치고 가게로 가는 길이면 평범했던 걸음도 제 여우를 떠올릴수록 조금씩 빨라졌다. 낮에는 저를 보고 비웃는 여우와 티격태격하고 밤이 깊으면 자연스레 여우의 침대 한편을 차지했다. 길마다 여우가 생각나는 물건 앞에선 잠깐 발이 멈췄다. 바쁜 일정에는 늦은 저녁이어도 얼굴은 비추려 했고 그마저도 안 될 때는 종이 여우를 통해 말을 전했다.

 

백란은 책을 읽던 중, 제 인간의 발소리가 들리면 일찍이 책을 덮어 문을 바라봤다. 낮에는 글을 쓰거나 과제에 머리를 부여잡는 유단을 보며 조소를 지어주었고, 별이 오른 밤이면 당연하게 손을 잡아 2층으로 이끌었다. 유독 어둠이 짙은 밤에는 종이 여우로 하여금 배웅을 보냈고, 오래 소식이 없으면 꿈으로 찾아들었다.

 

둘이 서로를 찾아 무엇을 하는가 하면, 별거 없었다. 재작년 봄에는 구렁이 요괴 몰래 2층에 게임기를 들고 와서 밤새도록 같이 게임을 했다. 해가 비친 서로의 몰골에 비웃어주고 더 말할 기운도 없던 터라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어지러운 초여름에는 도둑처럼 입술을 훔친 백란에 유단이 도로 열이 올라 어쩌다 보니 며칠을 묵고 갔다. 가을에는 교과서에서 볼 법한 악기를 꺼내길래 기웃거리다 붙잡혀 얼결에 연주법을 배우고, 깊은 겨울에는 추위가 싫어 가게 난로 옆과 이불 속에 붙어있었다.

 

헤아리자면 그런 것들이었다.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처럼 무엇을 하든 곁에 있었다. 서로 한없이 다정하게 애정을 전하는 날이 있으면 어느 날엔 각자 자기 일을 하다 아무런 말 없이 지나가기도 하는 일상이었다.

 

그 날도 2층에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번엔 게임이나 악기 대신 종이접기였다. 잠을 부르는 온유한 공기 속에 유단은 나른히 시선을 굴렸다. 부지런한 손놀림이 계속해서 종이를 접고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이미 몇 줄을 세워놓고도 수북이 쌓여간다. 질리지도 않는다. 얼마나 더 접으려는 거야.

 

"평소보다 너무 많이 접지 않아?"

"어느 인간 덕에 남아나질 않아서요."

"그게 내 탓이야? 전부 남의 거 탐내는 녀석들 때문이지."

 

백란은 유단 앞에 반듯하게 펼쳐진 종이들과 대여섯 개 접어낸 나비를 바라봤다. 차마 각이 살아있다고 하기 어려운 모양새로, 한 마리는 접던 중에 너무 당겨서 살짝 찢긴 티가 났다. 제일 먼저 접었던 것이리라.

 

"이 쉬운 나비 접기도 이런 상태여서야."

"네 눈에 만족스러운 게 있긴 할까. 어쨌든 접는 법만 외우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

 

비행기에서 나비 정도면 많이 발전한 거지. 고등학생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은 실력임은 인정한다. 백란이 알려주던 걸 따라 해봤지만 유단의 손에서는 번번이 엉성한 형태가 나왔다. 가까스로 모양을 갖추어도 옆에서 지켜보던 백란에겐 탐탁지 않았다. 기초부터 세우는 게 낫겠다며 종이접기 책을 받은 게 얼마 전이었다.

 

"넌 늘 여우만 접더라."

"제가 쓰기에 가장 편한 상징이라서요. 담는 의미와 용도에 따라 매개체 또한 형태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그럼 나비는 무슨 용도야."

"나비는 주로 눈을 대신하거나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만 사람이 쉽게 접하는 만큼 의미가 다양한 편이죠. 뭐, 지금은 활용법을 알려드린다 해도 제대로 할 수 있기나 합니까. 똑바로 접기나 하십시오."

 

설명을 들으며 하얗고 노란 종이 나비를 툭툭 손끝으로 건드렸다. 으레 따라붙은 핀잔은 적당히 걸러 들었다. 하나는 여우 주고 다른 건 봉인낭에 넣고 다닐까. 유단이 제법 잘 접힌 것을 고르려 빤히 보고 있자 나비가 날갯짓을 시작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나비는 작게 열린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유단과 백란의 고개가 따라 창문을 향한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저를 봐서 무엇합니까."

 

한 발 늦게 나비들이 날아간 창문을 활짝 열었으나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애꿎은 동물이나 요괴들에게 먹히겠군요."

 

옆에 다가선 백란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고양이나 까마귀가 종이를 먹어도 괜찮던가. 잘못 먹고 탈이 날 동물을 떠올리며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쟤네 어떻게 데려와."

"기왕 깨우신 거 따라가 보십시오. 의도하신 게 아니어도 이유 없이 날아갈 리는 없으니까요."

 

여우는 이 상황에 조금 흥미가 생긴 것 같았다. 일단 저대로 종이 나비가 밖을 돌아다녀서 좋을 게 없긴 하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매개체여도 깨운 이상 어느 정도 힘이 담겨있어 회수는 해야 했다. 실을 당긴다는 느낌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조언에 끄덕인 유단은 아래로 향했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자 쌍둥이가 보였다.

 

"형님, 어디 가세요?"

"방금 나비 못 봤어?"

"아! 걔네 유단이 나비구나. 방금 밖으로 나갔어."

 

가게 문을 나섰다. 날짜는 봄일 텐데 찬바람이 계속 이어졌다. 이게 다 이상기후 때문이다. 이러다 진짜 봄이 없어지는 거 아니야? 유단은 느슨했던 목도리를 고쳐 맸다. 가게 안에 있다 나왔을 뿐인데 느껴지는 온도부터 다른 것 같았다. 으슬으슬 떨리는 팔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머리카락 끝을 당기는 듯한 감각을 더듬어 나아간다. 가게 근처를 맴도는 녀석을 시작으로 저 앞에 나비무리가 보였다. 가장 가까이 있는 종이 나비를 불러들이고 남은 녀석들 쪽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천천히 연날리기의 얼레를 돌리는 감각으로 부르자, 나풀나풀 잘도 돌아다니던 나비가 한꺼번에 유단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얘네는 대체 왜 밖에 나간 거지. 의도치 않게 종이를 움직인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여우한테나 물어봐야지.

 

"저 가게에서 나오시던 걸 봤는데 혹시 주인 되십니까?"

 

가게로 향하려던 유단이 재차 돌아봤다. 한 손에 비단 보자기 상자를 든 택배기사가 있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답을 기다리는 택배기사의 모습이 한차례 흔들린다. …까치? 요괴잖아. 손님인지 정말 요괴가 택배 배송 일을 하는 건지 몰라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내가 주인이긴 하니까.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전달해 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까치요괴는 인상 좋은 웃음을 짓고 옆구리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요괴한테 함부로 뭐 받으면 안 된다. 하지만 택배기사잖아. 유단의 생각과 달리 이미 손이 나가 있었다. 무심코 집에서 하던 버릇대로 물건을 받아들였다. 명절 선물 세트 같이 생겨서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보자기 매듭에 노리개까지 여럿 달아 장식한 게 비싸 보인다. 유단이 물건을 받아들자 까치요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천호님께 인사 전해주세요."

 

퍼드득 하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불었다. 쾌청한 하늘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까치는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새 아닌가. 요괴 사회에 택배기사였다니. 하긴 택배 기다리던 사람에게 좋은 소식이긴 하겠다.

 

나비를 찾아 밖으로 나섰던 유단이 한 손에 비단 보자기를 들고 오자 신문을 읽고 있던 도씨가 어슬렁어슬렁 먼저 다가왔다.

 

"웬 거야?"

"나도 몰라, 까치요괴가 주고 가던데. 누가 주문한 거 아냐?"​

"까치요괴? 그러면 화류놀이 초청장이지! 얘들아, 와봐라!"

 

화류놀이? 아는 게 있는지 까치요괴라는 말을 들은 도씨가 쌍둥이를 불렀다. 그 소리에 빗질하던 쌍둥이와 테이블을 닦던 구렁이 요괴도 모여들었다. 아래층이 소란스러우니 안쪽 계단에서 여우도 내려온다. 이 수상한 택배에 백란과 유단을 제외한 모두가 들떠 보였다. 어서 풀어보라 재촉하기 전에 가까운 테이블 위에 물건을 놓았다.

 

"화류놀이라… 올해는 꽤나 늦은 시기군요."

"화류놀이가 뭐야."

"삼짇날 이뤄지는 꽃놀이입니다. 꼭 그날 하는 게 아니니 대략 ​음력 3월 중에 하는 꽃놀이라 하는 것이 옳겠네요."

"삼짇날이면… 3월 3일 맞지?"

"유단이가 삼짇날을, 음력 날짜를 알고 있어?"

 

채설이 놀라 입을 가리고 외치자 채우가 창문을 밀어젖힌다.

 

"해는 제대로 떠 있어요!"

"지금 해가 서쪽에 떠 있는지 확인하려던 거야?!"

"정말 아는 게냐. 화전이나 얻어먹을 줄 알지 모르는 것 아니고?"

"너희가 작년에 알려줘 놓고 이런 취급이야? 농사 일 바빠지기 전에 꽃구경하면서 노는 날이잖아."

"허…맞는 말이긴 한데. 네 녀석이 말하면 영 멋이 안 난다."

 

이런 거에 멋있고 말고가 어딨어. 심드렁히 답하는 유단을 뒤에서 보던 도씨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노려보던 흑요도 매년 화전 해먹인 게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며 표정에 힘을 풀었다.

 

"왜, 요괴들 꽃놀이는 뭐가 달라?"

"다를 거 없습니다. 인간들과 달리 화류놀이가 매년 있지 않다는 정도뿐이죠."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요괴들의 화류놀이는 말하자면 꽃 축제 같은 거였다. 다들 좋은 옷 입고 나와서 먹고 마시며 밤늦도록 춤과 꽃을 구경한다. 모든 초대객들에게 그 해의 대표가 되는 꽃을 전하는 게 관례로, 꽃이 출입증 같은 것이란다. 여우의 설명을 듣던 사이 채설이 나서서 보자기를 풀고 나무함을 열었다. 여는 순간부터 향이 퍼진다. 빛이 맺힌 붉은색 꽃송이가 들어있었다. 알고 있는 꽃이다. 조금 더 따뜻한 날씨가 되면 뒤뜰에 새빨간 꽃을 피워내던 나무, 모란이었다.

 

"올해는 모란인가 봐."

"하나, 둘… 단이 형님 몫도 있어요!"

 

쌍둥이는 유단 몫의 꽃이 있다는 사실에 선물 받은 아이처럼 기쁘게 웃었다. 그 소리에 도씨와 구렁이 요괴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몫이 있다는 것뿐인데 어째서 너희가 더 좋아하는 건지.

 

"이번에는 다 같이 갈 수 있겠다!"

 

평소였다면 알았다고 하겠지만 좀 있으면 시험 기간이다. 시험공부로 벅찰 텐데 요괴들 꽃구경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일 간다고 해도 천안을 가진 인간이라고 요괴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일 밖에 더 될까. 유단의 표정을 살핀 쌍둥이가 거절을 듣기보다 앞서 곁으로 다가왔다. 기대를 가득 담은 얼굴이 부담스럽다.

 

"같이 가실 거죠? 화류놀이에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요. 청명도 지나서 지금이 딱 좋은 시기예요."

"가자, 응? 안 그래도 삭막한 감수성이 더 말라버리기 전에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거야."

 

왜 이렇게 적극적이지. 그냥 꽃구경하는 거라면서. 이 동네 나무나 뒤뜰에도 있잖아. 저쪽 강 근처만 가도 충분하고. 보통 놀러 가는 문제에 가게는 누가 보냐고 한마디 얹었을 구렁이 요괴가 조용했다. 뒤 쪽를 돌아보니 입꼬리를 올리던 도씨와 구렁이 요괴가 멋쩍은지 헛기침을 해댄다. 힐끗, 유단과 눈이 마주친 도씨가 샐쭉 웃었다.

 

"저번 화류놀이 때는 비가 와서 취소됐지. 또 그전에는 청명이 코앞이라 못 가고. 새 옷도 지었는데 못 가서 애들이 실망을 많이 했어. 너도 이번 기회에 어떠냐?"

"오라버니, 바람 넣지 마시죠.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갔잖습니까. 공부에 집중하는 게 맞지요."

 

구렁이요괴 말대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채우와 채설이 두 손을 맞잡고 바라보는 탓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쌍둥이 뒤에 버티고 선 도씨도 신이 난 거 같다. 제대로 거절을 꺼내지 않는 유단에 쌍둥이는 타깃을 변경했다.

 

"천호님, 천호님도 가게에만 있지 말고 같이 가자. 안 간 지 오래 됐잖아. 유단이는 화류놀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봄에 꽃구경 한 번, 봄바람 한 번 맡지 못하고 공부만 하고 있다니 가여워. "

"단이 형님도 요즘 계속 바쁘셔서 잠시 기분전환이 필요하실 거예요. 그리고 정원이라면 희귀한 씨앗이나 좋은 약재도 얻어올 수 있을 거고요."

 

여우가 축제나 연회 자리를 귀찮게 여긴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다들 다녀오라 하고 가게에서 취미 생활을 보낼 테지.

 

"모처럼이니 가볼까요?"

 

뜻밖의 대답에 유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담담한 표정의 여우와 눈이 마주친다. 백란에게 향했던 시선들이 유단에게 몰린다. 뭐야 나만 빼고 다 간다고? 소외감을 느끼는 스스로가 당황스럽다. 쌍둥이가 슬쩍 나무함에 새겨진 날짜를 보인다. 여우가 눈짓한다. 어쩌시겠습니까?

 

한숨을 내쉬며 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해본다. 날짜도 절묘했다. 모든 시험이 끝났을 무렵이다.

 

"…거기 인간이 가도 되는 거야?"

 

운을 띄우자 쌍둥이들이 작게 환호성을 질렀다.

 

"가능하니까 초청장이 온 것이죠. 정원의 주인도 소문 속 인간이 궁금했나 봅니다."

"까치요괴도 그 말 하더라. 대체 어떤 소문이 나돌고 있길래.​"

"여러 가지 있죠. 듣고 싶으십니까."

 

또 어지간히 부풀려진 얘기일 게 뻔했다. 고개를 가로젓자 백란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유단을 바라봤다. 인간임을 드러내기 싫다면 어디 가면이라도 하나 쓰시겠습니까? 천호님, 그러면 고양이 가면이 좋겠어.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 얼굴을 만들어드릴게요. 여우가 가벼운 농담을 띄우자 쌍둥이들이 합세했다. 눈을 흘기며 대꾸해도 애들은 그것마저 우스운지 키득거렸다.

 

도씨는 이전에 맞춘 나들이옷을 꺼내두자며 휘적휘적 너른 걸음을 떼었다. 한바탕 유단을 놀리던 채설이 손뼉을 쳤다. 유단이 옷도 지어야 해. 뒤이어 채우는 꽃이 담긴 함을 들고 흑요 곁에 섰다. 누님, 저번에 옷을 지어준 분과 연락이 될까요. 확인해봐야겠구나. 벌써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며 요괴들은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다. 방금 전의 떠들썩함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근데 무슨 심경의 변화야. 연회를 간다고 하고."

 

물음에 여우는 말없이 눈을 맞춰왔다. 내가 뭘 놓쳤나? 아 그래, 화류놀이에는 온갖 희귀한 씨앗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수집욕 많은 여우가 희귀하다는 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치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 그거려나. 그러고 보면 여우는 사시사철 꽃을 근처에 두고 있다. 자신이 가꾼 것에 관심을 두고 꽃이 피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었다. 어라, 내 생각보다 더 꽃을 좋아했나. 정말 구경이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 밖에 다른 이유라면… 어?

 

유단이 스쳐 가는 생각에 멈춰있자 백란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어딘가 신세 한탄과 닮은 한숨이었다.

 

"연인이라는 자각은 있으신 줄 알았는데요."

 

설마.

 

"예, 바보라고 했더니 바보가 되었군요. 이럴 때면 말이 참 무섭습니다. 제가 좀 덜 할 것을 그랬을까요. 아, 제가 덜한다고 해서 사실이 바뀔 수는 없겠네요. 실언이었습니다."

 

굳어버린 유단이 백란의 표정을 살피려 하지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를 마시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시던 중이었다면 필시 사레가 들리고 말았을 거다. 지금, 그러니까. 이 여우가. 희귀한 것에 대한 흥미나 꽃을 보고 싶다는 변덕이 아니라, 바쁜 제 연인을 데리고 꽃이 보고 싶다는 거였다. 최소한 유단은 그렇게 이해했다. 여우의 귀와 꼬리가 대답을 요구하듯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됐습니다. 없던 걸로 하죠."

"잠깐, 잠깐! 어디가."

 

조심스런 말에 백란이 자리를 박차고 계단을 향하자 유단도 서둘러 뒤를 쫓았다. 엇박으로 울리는 두 발소리가 계단을 오른다. 이윽고 위층에서 뭐라 투닥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푸른빛 오후에 달큰한 향기가 흘렀다.

 

 

 

 

 

* * *

 

 

 

 

 

안 쪽에서 그릇을 닦는 흑요와 뒤에서 방석을 놓을지 이불을 놓을지 재잘대는 쌍둥이까지. 항상 평온하던 가게 안이 여러모로 붕 떠 있었다. 쓰러지면 두고 가라 말은 그리 했지만 다 같이 가기로 한, 그것도 여우가 같이 보고 싶다던 꽃구경에 건강을 해쳐 갈 수 없게 되는 건 유단도 피하고 싶었다. 군말 없이 따뜻한 차를 마시기로 했다. 향과 달리 생강차처럼 매운 맛이 났다.

 

화면에 띄워둔 자료들과 책을 번갈아 뒤적여가며 종이에 적었다. 어떤 게 나올지 감도 잡히지 않아 다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해왔던 대로 줄줄이 적고, 다시 새하얀 백지에 정리하며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일반적인 카페나 독서실보다는 확실히 가게에서 공부하는 게 훨씬 나았다. 카페에선 지나가는 사람마다 보이는 얼룩이 신경 쓰였다. 독서실은 어슬렁거리다 말 거는 녀석이 많았다. 그런 곳을 갈 바에야 집에 가지.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여우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배경으로 둔 채 공부하기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에 홍차색 노을이 내렸다. 잠깐 쉴까. 손목을 털어내고 기지개를 켰다. 여태 앞에 앉아 남의 전공책을 들여다보던 여우도 책을 덮었다.

 

"오늘은 주무시고 가십니까?"

"글쎄, 이따가 마저 공부할 생각이긴 한데."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쯤, 가게 내에 모습이 보이지 않던 도씨가 들어왔다. 품에 상자를 들고 오는 게 다른 용무가 있었나보다. 어디 바둑 두러 간 게 아니었구나. 도씨는 유단을 보고 어딘가 우쭐한 표정을 짓고 곁으로 다가왔다.

 

"가게에 있었네? 마침 잘됐다. 네 새 옷 왔다."

"유단이 옷!"

"형님 나들이 옷!"

 

유단보다 쌍둥이가 먼저 반응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도씨에게서 상자를 받았다. 먼저 상자를 열어보고는 싱글벙글 웃는다.

 

"옷 짓는다더니 진짜로 했어? 돈이 어디서 나서."

"천호님께서 옷감을 내어주셨지. 감사하게 받기나 해라."

 

도씨의 말에 유단이 맞은 편 백란을 향했다. 놀라 둥글어진 시선이 닿자 백란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읽던 책을 정리해 내밀었다.

 

"남는 천을 내어드렸을 뿐입니다. 구석에 박혀 무엇도 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것보단 누구에게라도 쓰이는 쪽이 낫지요."

 

이전에 점원들의 옷 역시 여우가 나눠준 옷감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천계에서 받아오거나 일을 도와주다 얻게 된 것을 베풀기로 했다나. 도씨를 선두로 쌍둥이에 이어 구렁이 요괴까지 점차 테이블로 모여들어 여우에게 저번에 자신은 어느 비단을 받았다느니, 자기 옷에는 어떤 수가 놓아졌다느니 천호를 향한 칭송과 자랑이 이어진다. 여우는 치켜세워지는 게 듣기 나쁘지 않은지 가만히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자랑이 지나고 나서는 예전부터 요괴들도 봄맞이에는 바짝 힘주어 치장하고 온다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옛날 인간들도 그러했듯이 새 옷을 지어 입거나 옛 옷을 수선해 장식을 달고, 한 데 모여 웃고 떠드는 일이 주가 된단다. 축제 간다고 여러 옷을 대어보던 미아 누나가 떠올랐다. 인간이고 요괴고 다를 게 없네.

 

"아무튼 간에 어서 가서 입어봐라. 어디 불편한 곳 있으면 고쳐 달라하지."

"나는 유단이 옷에 맞출 장신구 찾아볼게. 채우랑 먼저 가 있어."

 

어서 가요, 채우가 소매를 붙들고 환한 얼굴로 바라본다. 어차피 잠깐 쉬려던 참이었다. 채우는 복도를 걸으며 화류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거렸다.

 

"저도 예전에 천호님께 들었는데 원래는 초청제가 아니었대요. 모두에게 열려있었는데 정원에 가려고 너도나도 싸움이 나니까. 주인 분이 믿을만한 요괴들을 통해서만 초대를 하게 됐대요."

"그 정원에 뭐가 있길래 싸움까지 나? 그냥 꽃나무 있고 그런 게 아니었어?"

"신묘한 약이 아주 많은 곳이거든요."

 

지인제로 바뀐 후에도 어떻게든 가고 싶었던 요괴들이 초대되는 이들을 보며 조건을 추측했다고 한다. 들어맞는 하나를 찾기보다 안 되는 것을 찾는 게 더 쉬웠다. 그리하여 알아낸 것은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하는 등등, 채우가 늘어놓는 조건들을 요약하자면 나쁜 짓을 한 요괴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거기에 소문이 하나 더 붙었는데, 초청받은 이들 중에 선행으로 유명한 이는 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베개 맡에 정원의 약이 놓여있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에 요괴들은 하나같이 정원에 가고자 봄이 다가오면 좋은 일을 하려 했다.

 

초대받고 싶어서 봄이 오면 좋은 일 하려 한다는 게 꼭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착한 아이로 지내려는 애들 같다. 착한 일 하려다 작심삼일로 끝나거나 오로지 그 날짜가 있는 달에만 사심을 갖고 열심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반월당의 요괴들에게 선행이란 언제나 해왔던 일이다. 도움을 구한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할 뿐. 주변 요괴들은 대요괴인 천호와 그 수하들이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도와준다는 것 정도는 아름아름 다 알고 있다.

 

"너희는 계속 초청장 받았겠네."

"맞아요. 천호님이 계셔서 저희가 초청장을 제일 먼저 받는 집이었어요."

"매번 받는데도 그렇게 기뻐할 만큼 좋아?"

 

꽃송이에 기쁘게 웃던 쌍둥이와 기꺼워하는 도씨나 구렁이 요괴가 떠올라 물었다. 장본인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자신들이 해왔던 일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 녀석들에겐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옷 방에 도착해 장지문을 열던 채우는 동그란 눈으로 유단을 올려다보았다. 이내 배시시 웃는다.

 

"그것도 있지만, 단이 형님 몫이 있었으니까요."

"그게 왜?"

"형님의 선행이 정원에 닿을 만큼 다른 요괴들에게도 소문이 난 거잖아요. 이제 어엿한 명성이 생기신 거죠."

 

선행보다 천안이랑 누명 벗었다는 얘기로 접하지 않았을까. 명성은 달갑지 않다.

 

"그리고, 형님이 저희 식구인걸 알아보셨다는 거니까요. 그게 기뻤어요."

 

옷상자를 품에 안은 채우는 조금의 설명을 덧붙였다. 초청장은 모두 손님의 '집'으로 배달되도록 되어있는데 유단의 것이 반월당으로, 그것도 나무함 하나에 같이 담겨왔다. 그건 식구가 많은 집에만 그러거든요.

 

꽃상자 보내는 거에 그런 의미가 있는 줄 누가 알겠어. 이제 보니 사전 지식 없는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요괴들은 다 그 뜻을 알았을 거다. 채우는 유단의 얼굴을 기웃거리더니 즐겁다는 듯 웃었다. 이제 갈아입는 거 도와드릴게요. 채우는 유단의 등을 떠밀어 방으로 들여보냈다.

 

​반월당에서 지낸 후 부터 한복은 얼추 제 손으로 입을 수 있게 된 유단이었다. 내가 알아서 입겠다 했으나 채우는 옷상자를 품에 들고 건네주지 않았다. 네, 그럼요. 손 안 닿는 곳이 있을 테니 그것만 도와드릴게요. 마치 어린애 고집에 끄덕여주고 도움을 주는 태도라 유단은 게슴츠레한 눈을 했다.

 

 

 

 

채우가 도와줘서 다행이다.

 

가끔 명절 때마다 입어보던 것과는 형태가 달라 순서마저 모르겠다. 다른 시대 옷인가. 겹겹이 입혀지는 옷에 매듭끈과 허리띠가 있구나 하는 정도만이 자신이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어차피 가려질 거 안에 무늬는 왜 넣은 거고 혼자 이걸 다 입고 살 수 있나 싶어진다. 펄럭이는 옷자락이랑 넓은 소매가 어디 걸려 넘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다 됐어요. 불편하신 건 없죠?"

 

옷감 자체가 신기했다. 닿는 감촉도 부드러워 괜찮았고 잠깐 움직여보기로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 차례 유단을 쭉 둘러본 채우가 만족스레 웃었다.

 

"천호님 안목이 높으세요. 형님께 가장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주셨네요."

"…남는 옷감이라더니 걔가 골랐어?"

"형님이 치수재고 가신 날에 여기서 계속 비단을 들여다보셨는걸요."

 

백란이 골랐다는 소리에 유단이 조용해졌다. 슬쩍 옷 방을 둘러보다 괜스레 소맷자락을 매만졌다.

 

"그나저나 누나가 왜 안 오지… 가서 다 됐다고 말하고 올게요. 잠깐 여기 계세요."

"아냐, 안 해도 돼. 옷도 금방 갈아입을 거야!"

 

여기서 더 번거로워지고 싶지 않았다. 유단이 채우를 붙잡아 세우려 했지만 미리 정해두는 게 좋다며 벌써 저만치 가버렸다. 혼자 멀뚱히 서서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벗을까. 옷이 잘 맞는 건 확인했다. 장신구는 안 해도 그만이지. 이따 찾아올 쌍둥이가 아쉬운 소리를 하겠지만 뭐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걸치기만 한 옷은 쉽게 벗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뒤쪽 끈이 안 풀린다. 손으로 어림잡으면, 모양낸다고 복잡한 매듭이 묶인 듯했다. 방 안에는 거울, 하물며 비춰볼 무엇도 없어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다. 되는대로 당기면 뜯어질 것 같았다. 두 손을 뒤로 돌려 형태를 살피는 중에 스윽,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우가 왔나보다.

 

"금방 왔네? 이거 좀 도와줘."

 

도움을 요청하며 돌아보자 그곳엔 채우가 아니라 여우가 서 있었다. 별 이상한 꼴을 다 보겠다고 한심함을 고스란히 옮겨 담은 표정이다.

 

"너는 왜 왔어."

"못 올 곳도 아닌데요. 이쯤이면 다 입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하다 하다 별 꼴을 다 봅니다. 우선 묻겠습니다만 입는 겁니까, 벗는 겁니까."

"벗는 중, 끈이 안 풀려. 도와줄 거 아니면 나가서 채우 좀 불러와 주던가."

 

혼자 애먹는 답답한 모습에 백란은 조언을 얹기로 했다. 왼쪽으로 돌리세요. 아니 그쪽 말고요. 방향 구분을 못하십니까. 거기서 돌리시라고요. 현대인이 접하는 매듭이랄 것은 꼬인 줄 이어폰과 운동화 끈 정도였다. 유단은 끈을 다룰 일이 적었고, 보이지 않는 매듭을 설명만 듣고 풀어낼 재주는 더더욱 없다. 훈수를 들으며 노력한 결과, 유단은 끈을 더 단단히 묶어버렸다.

 

헛웃음이 다 나는 작태에 보다 못한 백란이 성큼 다가왔다. 끈을 만지던 유단의 손을 떼어냈다. 등허리에서 꼼지락거리며 닿는 게 간지러웠다. 슬그머니 앞으로 몸을 빼자 별안간 당기는 힘에 비틀거렸다. 유단을 제 앞으로 당겨오던 백란도 생각 외로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잠시 손이 멈췄다. 풀라고 했더니 왜 묶어놓고 있냐던 여우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조용한 방에 스치는 옷자락 소리가 전부였다. 이거 좀. 뭔가.

 

"뭡니까, 이 분위기는."

"내가 묻고 싶다."

 

먼저 말문을 연 백란에 유단도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말하고 나니 더 신경 쓰인다.

 

"너 손 좀 어떻게 해봐. 간지러워."

"제가 뭘 했다고요. 잠깐 참아보십시오."

"그게 참으란다고 돼? …​그만 당겨."

"계속 피하시니 그런 거 아닙니까. 풀긴 해야지요. ​기껏 좋은 옷을 입혀놓아도 다룰 줄 모르니."

"모를 수도 있지. 이런 옷을 요즘 누가 입는다고."

 

의식하게 되는 분위기를 얼버무리려 몇 번 실없는 소리가 오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소용이 없어 종내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백란이 마침내 끈을 풀어내자 유단이 바로 거리를 벌린다. 등 뒤에 서 있던 백란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갔다. 표정에 불만스러움이 스민다.

 

얼른 벗어버리고 나가야겠다. 드디어 풀린 끈을 책상에 올려놓으려던 찰나,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기어코 서랍 손잡이에 걸렸다. 시원스레 나아가려던 만큼 발이 꼬인다. 유단이 본능적으로 잡을 것을 찾아 팔을 내저었다. 기울어지는 시야로 반대편에서 낚아채는 손이 보였다.

 

쿠당탕- 후두둑.

 

책상 위 상자와 개어둔 옷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다. 바닥에 머리를 박는 일은 없어 다행이었다. 책상을 짚으며 몸을 돌리자, 제 손목을 붙든 여우와 마주했다.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다.

 

"참 가지가지 하십니다. 주변은 살피면서 다니시죠."

"어… 어, 고마워."

 

얼떨떨하게 말을 전한 유단은 여태 놓아주지 않는 손과 불만스러운 표정에 의문을 표했다. 왜 저러지? 가만히 응시하는 백란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누구 하나 먼저 시선을 돌리는 일 없는 눈 맞춤 사이로 여우의 눈에 장난기가 들었다. 뭐야, 뭐 하려고.

 

서서히 가까워지는 백란에 뒤로 물러나 보지만 책상이 닿았다. 졸지에 책상과 여우 사이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손목을 붙잡던 미지근한 온기가 떠난다 싶더니 허리를 붙잡아 올렸다. 으왓, 당황이 입술을 타고 나가며 부지불식간에 책상 위로 앉혀졌다.

 

자기도 요괴랍시고 힘은 세서, 평생 땅 밟고 산 사람을 갑자기 들고 말이야. 예고 좀 하라고. 불평을 쏘아붙이려 했다. 그랬는데. 불평조차 쏙 들어가게 만드는 얼굴이 보였다. 올려다보는 연갈색의 눈동자, 가지런한 속눈썹, 호선을 그리는 엷은 입술. 고요 속에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바람결 같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우가 제 시선이 닿은 자리를 알아차렸다. 가까이 들여다보는 눈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말았다.

 

그 때, 힘차게 문이 열렸다.

 

"큰소리가 나던데 무슨-"

 

바닥에 떨어진 상자와 옷가지. 흐트러진 차림으로 책상에 앉은 유단과 그 앞에 가까이 다가붙어 고개를 내민 백란. 패물함을 들고 왔던 채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채우가 허둥지둥 다급히 문을 닫았다.

 

"ㅈ, 죄송해요!"

"미안해! 몰랐어!"

"아니야!!"

 

복도에서 전하는 사과에 반박했지만 이미 문 너머에서 재빠른 발소리가 울린다. 아스라이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에도 여우는 앞에 자리 잡고서 벗어날 기미가 없다. 정말 하려고? 유단이 내려다보며 의중을 살펴보려 해도 연인의 다정이 있을 뿐이다. 허리를 붙잡은 손이 책상을 짚고 천천히 멀어졌던 간격을 되찾는다. 제게로 몸을 기대는 여우에 질끈 눈을 감았다.

 

"기대하셨나 봅니다."

 

뭐?

 

나직하게 읊조리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어느새 여우는 몸을 물려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 섰다. 제대로 갈아입고 나오시죠. 더 도와드려야 합니까? 빙글빙글, 여우가 여우같이 웃었다. 백란은 장난이 통해 즐거운 어린아이같이 굴었으나 장난이라기엔 심히 진심에 가까워 보였다. 유단은 새빨간 얼굴로 와락 인상을 구겼다. 문을 열고 나가는 백란은 벌써 표정을 갈무리한 후였다.

 

혼자 남은 방에서 유단은 따끈해진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책상에서 내려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어떻게 갈아입었는지도 모르게 본래 입던 평상복을 껴입고, 바닥에 널브러졌던 연회복을 상자에 담으려 했다. 그 고생을 하게 만든 끈이 보여 이마를 쳤다.

 

길고도 짧은 몇 분이었다. 방을 나서 곧장 계단에 발을 디뎠다. 문을 열어젖히면 무슨 일은 커녕 자긴 이곳을 벗어난 적 없는 것처럼 담백한 표정의 여우가 책을 고르고 있었다.

 

"놀리는 게 아주 재밌지?"

"재밌으니 하지요."

 

꼬리를 살랑대는 백란은 담담하게 말하며 소매로 입을 가렸다. 아까는 뭐 때문인지 기분 나빠 보이더니 장난에 기분이 좋아지고 이제는 차분한 척을 한다. 여우의 표정이 다양해진 만큼 알아차리게 되는 것도 늘었다. 저거 소매 아래로 웃고 있을 거다. 자기가 먼저 들이밀었으면서 기대했냐느니 재밌다느니. 자기만 놀래킬 줄 아나.

 

"야, 너 손 치워 봐."

 

유단이 아직 열 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며 말하자 백란은 입가를 가리던 소매를 치워냈다. 태연하던 눈과 달리 누가 봐도 웃고 있었다. 손 치웠는데요. 다음은 무엇을 바라느냐는 듯 말하는 게 못내 얄미워, 여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저 맞닿을 뿐인 입술이 민망스러운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은 예상치 못한 듯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표정을 한 여우가 얼굴을 붉혔다. 백란이 귀와 꼬리를 삐죽 세운 채 굳어있는 것을 본 유단은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1층에 놓인 짐과 가방을 챙길 때만 해도 자연스러웠던 행동에 점차 속도가 붙는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전속력으로 튀어 나갔다. 봄바람 속 어두운 전통 거리에 알록달록한 전등이 켜졌다. 나쁘지 않은 기분인 것과 별개로 사람이 너무 부끄러우면 목에도 열이 오른다는 걸 체감했다.

 

 

 

 

 

* * *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시험지를 제출하고부터는 머리가 하얗게 비워졌다. 교정을 나서는 해방감도 잠시 밤샘의 여파가 몰려왔다. 연속 밤샘은 할 짓이 아니었다.

 

여우에게 한 방 먹인 후 집에 돌아와 집중하려 해도 마지막에 본 표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공부가 손에 안 잡혔다. 꼬리를 무는 상념에 지지부진하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 공부하게 됐다. 벼락치기와 다름없다.

 

다시는 밤새우면서 공부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아야지.

 

고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공연한 다짐이었다. 발이 제대로 땅을 딛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무겁고 은은하게 두통이 있어서 멀미하는 기분이다. 집에 가지 말고 반월당에 갈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처음 가게에 가는 거였다. 잠깐 여우를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고민이 들었으나 이런 상태로 집에 갔다간 곯아떨어져 내일 있을 꽃놀이고 뭐고 다 못 지킬 거 같았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머리를 기댔다. 벚꽃은 진작에 다 졌다. 올해는 평년보다 추위가 길어 개화가 느려졌다지만 이 시기까지 피어있을 순 없었다. 꽃구경 소리에 가장 먼저 떠올릴 벚꽃은 다 져버렸는데 요괴들 정원은 괜찮은 건가. 스치는 풍경 속 나무들은 녹색 잎이 가득했다.

 

 

 

 

지하철과 버스에서 잠들고 깨어나길 반복했더니 정신을 차려보면 가게 앞이었다. 손님인 줄 알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온 쌍둥이는 희멀건 안색의 유단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판단을 마친 쌍둥이는 유단의 양옆에 팔짱을 끼고 데려갔다. 채설과 채우에게 반쯤 부축 받듯이 끌려가 마루에 앉자 질문이 이어졌다. 어디가 안 좋아? 머리 아파? 속도 안 좋지? 나열되는 말이 질문에서 확인으로 변해간다. 그 소리에 찻집 공간 쪽에 있던 여우가 다가왔다. 보자마자 미간을 좁히는 게 모르긴 몰라도 내 상태가 나쁘게 비친다는 건 알겠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약방에 갈래?"

"잠을 못 자서. 약방 갈 정도는 아니야."

 

휘휘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쭉 자면 나을 일이다. 아마도. 자신 없는 대답에 쌍둥이가 눈꼬리를 내린다.

 

"그럼 어서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아, 누나 그거!"

"아, 맞아! 잠깐 기다려 봐."

 

채우가 무언가 떠올리고 말을 걸자 뭘 어떻게 안 건지 대명사만으로 알아들은 채설이 나란히 안쪽으로 들어간다. 애들이 가기까지 곁에 선 여우는 말이 없었다. 그냥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는 게 다른 어떤 것보다 신경 쓰이게 만든다. 한 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서 거슬렸다. 눈을 비벼보지만 해결되는 건 없었다.

 

"그런다고 되겠습니까."

 

여우가 한마디 하며 제 손을 붙잡아 내렸다. 이제야 말을 하시는군. 여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느다랗게 내리뜬 시선 속 매도가 장난 아니다. 저 위에서 미련하고 아둔한 생물을 바라보는 느낌이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눈으로 욕하지 말고 차라리 말을 해."

"진짜 해도 됩니까."

"아니, 이미 충분히 들은 거 같아."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리는 눈가를 여우의 손가락이 조심스레 훑어갔다. 열은 없네요. 그냥 수면 부족이라니까. 목도리에 고개를 묻고 있으려니 저 쪽에서 나무함을 들고 쌍둥이가 돌아왔다. 모란이 담겨있던 나무함이다.

 

"약은 아니어도 정원의 꽃은 좋은 기운이 가득하니까 도움이 될 거야. 머리맡에 두고 자."

"하나로 안될 거 같아서 전부 가져왔어요. 천호님께서도 같이 올라가실 거죠?"

 

당장 저와 여우를 2층에 올려보낼 기세다. 그 전에 나 좀 씻고 올라갈게. 꽃은 제가 가져다 두겠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았음에 기뻐하던 쌍둥이는 두 인요의 말에 잠시간 서로를 마주 보더니 각자 한 사람씩 앞에 섰다. 채설은 백란에게 나무함을 건네고 채우는 유단과 목욕탕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삶아 죽일 듯 뜨거운 물을 놓던 요괴들이 인간용 물 온도 맞추는 것에 도가 텄다. 너무 내 집처럼 다녔나. 뿌연 수증기 속에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몸을 녹이고 있으려니 눈꺼풀이 무게를 더해간다. 유단의 고개가 조금씩 기울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에 번뜩 눈을 떴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잠들게 생겼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털었다가 실수했음을 깨닫는다. 아찔해지는 시야에 머리를 짚고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유단은 차츰 어지러움이 가시고서야 목욕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나오니 일전에 두고 간 옷이 놓여있다. 각 잡혀 놓인 옷은 깔끔한 거 좋아하는 구렁이 요괴 솜씨가 분명했다. 언제 왔다 간 거야. 욕탕에서 조느라 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나보다. 뻣뻣할 정도로 바싹 마른 옷에서 봄볕 냄새가 났다.

 

따뜻한 물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탓인지 완연한 봄 공기가 조금 서늘하게 느껴진다. 노곤노곤해진 몸으로 복도를 걸어가고 있자 맞은편에서 도씨가 다가왔다. 유단의 얼굴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크게 혀를 찬다.

 

"쌍둥이한테 들었다. 이번엔 잠을 안 잤다며? 공부를 평소부터 잘 할 것이지. … 누이에게 말해서 요깃거리라도 챙겨다 주랴?"

"평소에도 했다고. …아니 입맛 없어." ​

"그래, 그럼 어서 올라가 자라. 꼴이 그게 뭐냐."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야."

 

도씨는 몇 번 더 유단의 얼굴을 보고서야 가게 쪽으로 돌아갔다. 비척비척 계단 쪽으로 가는데 코 아래로 뭐가 주륵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손등으로 훑자 새빨간 게 묻어났다. 뭐야 피? 인지하는 순간 비릿한 향이 난다. 유단이 제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는 사이 투둑, 피가 떨어졌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당황하며 손으로 코를 쥐었다. 코피가 나는 건 아주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떻게 해야 했더라.

 

"들지 말고 숙이고 계십시오."

 

당황한 유단의 귀로 백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려다보니 여우가 내려오고 있었다. 유단은 손등과 손바닥이고 할 거 없이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조언에도 계단 위를 올려다보는 통에 백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금세 유단의 곁에 다가온 백란은 너른 소매로 콧대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당겨 숙이도록 만들었다.

 

"제대로 듣긴 한 겁니까. 고개를 숙이고 계시라 했습니다."

 

요 근래 본 적 없던 여우의 무표정에 반응이 느렸다. 고분고분 당기는 대로 숙이며 여우의 팔을 밀어냈다. 여우에게 피가 묻는 게 싫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손 떼, 옷에 피 묻어."

"이미 묻은 거 무슨 상관입니까.​"

"계속 네 옷으로 막을 수도 없잖아. 가게 쪽에 휴지 있겠지."

 

짚어준대로 마저 콧대를 붙잡고 고개를 숙인 채 말하자 여우가 말없이 제 손을 잡고 앞서 나갔다. 일부러 느릿하게 걷는 발이나 붙잡은 손의 배려를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진 않았다. 순순히 여우의 뒤를 따랐다.

 

찻집 공간으로 넘어가자 피 묻은 천호의 소매에 점원들이 일제히 동요했다. 저들 주인에게 무슨 일이 난 것인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던 이들은 백란의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손 틈새로 뚝뚝 피를 흘리는 유단을 보고 얼굴을 구겼다. 미간을 좁힌 도씨와 흑요는 곧바로 휴지를 찾고, 눈썹을 한껏 내린 채 울상을 한 쌍둥이는 두 인요의 곁으로 다가섰다.

 

건네받은 휴지를 코 밑에 대고 쌍둥이가 전해준 물수건으로 엉망이 된 손을 닦아냈다. 얼추 정리가 끝났을 쯤, 도씨에게서 완전히 멎을 때까지 앉아있으라는 주의를 받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고 타박하는데 어째 자신만 몰랐지 다들 올 것이 왔다는 태도였다. 하긴 저번부터 건강을 신경 쓰라거나 안색이 안 좋다는 얘기를 했었다. 조금 흘려들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시험 기간이면 늘 있던 일이라 괜찮을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코피를 쏟게 될 줄 알았나.

 

생각지도 못한 일에 놀라 잠이 깼던 건 잠시 뿐이었다. 속에서 쇠 비린내가 나는 건 차치하고 자고 싶다. 무거운 몸으로 의자에 있으려니 이대로 가라앉아 잠들 거 같았다. 한 손으로는 지혈 중이지, 다른 한 손은 아직 여우에게 잡혀있어서 턱을 괴고 있지도 못한다. 휴지를 떼어보면 흐르는 것은 없었다. 이제 멈췄나?

 

"조금 더 앉아계시는 게 나을 겁니다."

 

물음을 하기도 전에 여우가 답을 해왔다. 피로에 눈언저리가 뜨끈해지는 착각이 든다. 지그시 몇 번 깜빡여보지만 나아지는 게 없어 그냥 눈을 감았다.

 

"여기서 잠들지 마시죠. 누가 옮기라고요."

"눈만 감고 있을게."

"그대로 주무실 거 압니다."

 

제 손등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마지못해 눈을 떴다. 내리뜬 시야로 곁에 앉은 여우의 소매가 보였다. 하얀 옷에 갈빛 얼룩이 또렷했다.

 

"더한 것도 보신 분이 겨우 이것이 신경 쓰이십니까."

"…피는 잘 안 지워지잖아. 하얀 옷이고."

 

정말로 그래서인지는 자신도 모르겠다. 지난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도 아니었고, 여우를 배려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이전에, 단순히 그냥 싫었다. 졸음 섞인 느릿한 대답에 백란은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되물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이 시원했고 여우의 목소리가 잔잔해서 더는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다.

 

주홍색 노을이 가게 안을 물들인다. 그림자가 녹아드는 시간, 백란에게 노을이 번져왔으나 그는 어떤 색으로도 물들지 않았다. 어느덧 본연의 금빛을 두른 백란은 제 손을 붙잡고 잠든 연인을 바라봤다. 창백하던 얼굴에 노을빛이 들어 그나마 혈색이 도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제가 옮기게 되잖습니까.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잠든 유단을 내려 보던 백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숨 섞인 말과 달리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이어졌다.

 

 

 

 

 

* * *

 

 

 

 

 

차랑, 차랑. 얇은 파편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유리 시험관이나 실로폰의 짧은 막대를 스쳤을 때 들리던 맑은 소리와 비슷했다.

 

─ 오늘이야, 오늘이야. 얘, 일어나보렴.

 

속삭임과 꺄르르 웃는 소리가 뒤섞인다. 해가 올랐어. 그늘을 내어줄까. 노래를 부를까. 봄이 왔단다. 웃어주려무나. 놀러 오렴. 머리 위를 맴도는 소리는 모두 제각각 다른 말을 하고 있어 알아듣기 어려웠다. 수다스러움이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그 목소리가 천진하고 다정했기 때문이다. 누구야? 계속 저를 깨우는 이들을 향해 물었다. 이제 괜찮을 거야. 물음과 동떨어진 대답이 돌아왔다. 맑게 울리던 소리가 점차 멀어진다.

 

저를 감싼 온기에 유단은 슬며시 눈을 떴다. 잠들어있는 여우의 얼굴이 가까웠다. 시선을 굴려 상황을 확인했다. 발을 걷지 않아 어두운 천장과 머리맡에 놓인 나무함, 들춰진 이불 속 제 위로 아무렇게나 감겨있는 긴 꼬리까지. 익숙한 여우의 침실이다. 어제 코피를 쏟은 후에 그대로 잠들었나보다.

 

이 녀석 매번 사람을 바디필로우처럼 쓰네. 그 얌전하고 고상하다는 천호의 잠버릇을 떠들고 다녀도 나만 거짓말쟁이가 된다. 얹어진 다리는 치웠는데 팔이 문제다. 몸을 틀어 벗어나려 하지만 끌어안고 있는 팔이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다. 여우를 툭툭 건들고 어깨를 흔들자 미동 없던 눈꺼풀이 열린다.

 

“…일어나, 놔 줘.”

 

낮게 잠긴 유단의 목소리에 백란은 몇 차례 몽롱한 눈을 깜빡인다. 허리에 두른 팔이 힘을 더한다. 다시금 유단을 고쳐 안은 백란이 도로 잠들 태세를 갖췄다. 잠에 취한 게 명백했다. 온기를 찾아드는 모습이 요괴는 요괴구나 싶다. 놔달라고. 귀를 건들며 귀찮게 굴자 여우가 신경질적으로 귀를 파닥이고는 팔을 풀었다. 상반신을 일으키는 유단을 시선으로 쫓던 백란이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기운이 잘 맞아 들었나 봅니다.”

 

여우는 저와 똑같이 잠긴 목소리를 냈다. 보통 밤샘 후에는 잠을 자고 일어나도 찌뿌둥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등교날 늦잠 잔 것처럼 개운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나무함 속에는 모란 꽃송이가 빛을 두르고 있었다. 제각각 자기 할 말만 하던 목소리는 여섯, 빛을 내는 꽃송이도 여섯. 유단은 자신을 깨우던 이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고맙긴 한데 말이 많더라."

“이래서 도와줘봤자 무용하다는 것이겠죠.”

 

유단의 감상에 백란은 아침부터 눈을 흘겼다. 왜, 뭐. 내가 어쩌다 이런 인간을. 서로를 건조하게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두 인요는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것도 잠시, 유단이 먼저 이불을 걷고 침상에서 내려왔다.

 

은은한 꽃향기가 나는 침실에서 벗어나자 서재에 둥근 창으로 환하게 빛이 들고 있었다. 어두운 침실과 상반되는 밝음에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몇 시야. 낮인가?

 

“어, 유단이 일어났네. 몸은 괜찮아?”

“형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장지문을 밀어내고 쌍둥이가 모습을 보였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쌍둥이는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유단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은 거 같네. 한결 나아지셨네요.

 

“마침 깨우려던 참이었는데, 천호님은?”

“깨웠어. 옷 갈아입는 중."

“씻으러 가실 거죠? 끝나면 부르세요. 단장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얼른 하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다 뺏길 거야.”

 

요괴들 꽃놀이도 자리싸움이 있나 보다.

 

아래층에서는 구렁이 요괴와 도씨가 장신구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중이었다. 은을 하는 게 낫다, 아니다. 화려한 옷과 장식을 꺼내 머리를 맞대 고민한다. 서로 옷에 말을 얹다가 저렇게 된 모양이었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지. 불똥이 튈 거 같아 지나쳤다.

 

찬물로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쌍둥이에게 말을 걸러 가면 그 둘은 이미 화사한 색으로 꾸민 후였다. 하얗고 작은 꽃들을 머리에 땋아 장식한 채설과 밑단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채우가 눈을 반짝인다. 둥글게 오른 뺨에 기대가 어려서 귀엽긴 했다.

 

일전의 나들이옷을 겹겹이 걸쳤다. 채우에게 부탁해 뒤에 있던 장식 매듭은 옆쪽으로 옮겼다. 옷을 다 입으니 채설이 저번에 달지 못한 옥패를 허리에 달아주었다. 유단이 쌍둥이와 옷 방을 나섰다. 도씨는 장식 매듭과 구슬이 끼워진 세조대를 했고, 흑요는 평소엔 거추장스러워 하지도 않던 머리 장식을 올렸다. 장식은 은색으로 결정됐나보다. 가장 늦게 나온 백란 역시 봄에 어울릴 색으로 치장을 마쳤다. 햇살이 닿을 때마다 옷에는 정교한 문양이 드러났다.

 

봄맞이라고 한껏 꾸민다더니 정말이었다. 보통 때와 달리 반짝이는 보석을 매단 요괴들은 서로의 옷차림을 매만져주다 자신 몫의 모란을 각기 다른 곳에 장식했다. 멀뚱히 서 있는 유단에게 백란이 다가와 자신과 동일한 위치에 꽃을 달아주었다.

 

"끈을 옆으로 돌리셨네요. 또 우스운 꼴이 되고 싶진 않으셨나 보지요."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서는 둘에 다른 요괴들이 애써 몸을 돌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냥 꽃을 달아줄 뿐인데 요괴들 분위기가 이상하다. 우리가 뭘 했다고… 아. 유단의 시선이 고개를 돌린 쌍둥이에게 닿았다. 단숨에 머리를 스치는 장면과 그들의 오해를 풀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 와 뭐라 설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여우도 오해를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백란이 열어낸 길을 따라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눈부신 색채들이었다. 이미 져버렸던 목련이나 벚꽃처럼 익히 아는 봄꽃들 외에 이름 모를 수많은 계절의 꽃이 피어있었다. 각양각색의 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어지럽지 않고 정돈되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에 쌍둥이가 앞서 나간다.

 

가지런한 길의 앞에는 양 쪽에 높다란 기둥을 세워 이곳이 입구임을 알렸다. 늘어뜨린 장식들이 바람결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퍼뜨린다. 작은 종 혹은 얇은 유리 조각이 부딪히는 듯한 그것은 오늘 아침 꿈결에 들었던 소리였다. 풍경을 둘러본 유단은 한 가지 의심이 들었다.

 

"여기 있다가 돌아가면 일주일 지나있고 그런 거 아니지?"

"단절된 곳이 아니라 시간은 동일하게 흐릅니다."

 

등골이 서늘할 뻔했다. 중간고사가 끝난 거지 수업이 끝난 게 아니었다. 종이 여우로 대역을 세울 수도 없는 것들이다. 어떻게 보낸 대학인데요. 생각 없이 데려왔겠습니까. 안도의 숨을 내쉬는 유단과 걸음을 맞추던 백란을 향해 쌍둥이가 손짓했다. 입구 앞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입구 근처에서부터 천막을 치고 음식을 차리는 곳이 있었고 저 앞으로 이어진 다른 곳에서는 매대를 두고 뭔가를 사고팔았다. 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넓은 터에서는 벌써 술을 마시는 요괴들이 있었다.

 

제일 인파가 몰린 건 술을 파는 곳이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요괴가 꽃놀이에 술이 빠질 수는 없다며 시음을 권한다. 잔을 받아든 도씨가 냉큼 입에 머금더니 얼굴이 폈다. 그 표정에 혹한 흑요와 쌍둥이가 덩달아 잔을 받았다. 쌍둥이가 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걸 알지만서도 저 모습으로 술을 마신다는 게 영 껄끄럽다. 흐린 눈으로 보고 있으려니 향이 좋다며 세 요괴가 감탄한다. 자신감이 붙은 도씨가 유단에게도 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진짜다. 너도 괜찮을 거야."

 

그 진짜라는 게 못미덥다. 항상 도씨가 말해서 받아 마시지만 왜 맛있다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옆에 선 백란은 조용히 두 번째 잔을 받았다. 제 앞에서 술을 잘 마시지 않던 여우가 저러니 호기심이 들었다. 작은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봤다. 은은한 꽃 향이 퍼진다. 좀 괜찮을지도… 아, 아니다. 도씨는 인상을 구기며 잔을 내려놓는 유단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러고는 흑요와 함께 같은 술 몇 병을 사 들고 왔다.

 

그 다음으로 인기 있는 곳에는 요괴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는데, 그 너머로 다채로운 꽃이 휘날렸다. 앞에 있던 요괴들이 지나가고서야 무엇인지 볼 수 있었다. 거대한 판에 묘기처럼 재빠르게 화전을 굽는 작은 녀석들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제 몸만 한 뒤집개와 사투를 벌이던 요괴가 뒤뚱거리며 어렵사리 완성품을 관객에게 나눠줬다.

 

손에 접시를 든 채 주변에 놓인 평상을 둘러보다 연한 분홍빛으로 가득한 꽃그늘 아래로 자리를 잡았다. 요괴들은 자신이 받은 화전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확실히 받아든 접시에 놓인 건 모양새가 이미 화전이라는 분류를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재료는 동일하니까요. 누님도 가능하실 걸요."

"가능하고말고. 내년에는 특색 있는 걸 만들어볼까."

 

채우의 말에 흑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요괴가 만들어낸 화전을 관찰했다. 곁에서 듣던 유단의 머릿속에는 구렁이 요괴가 검풍으로 꽃을 조각내는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우는 하나 집어먹어 보더니 얌전히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유독 설탕물이 많이 든 게 여우에게 갔나보다. 백란은 입에 퍼진 단맛을 술로 넘겼다. 그 요괴는 천호라고 나름 귀한 설탕 잔뜩 넣어 대접하려던 거겠지만 이 편식하는 여우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꽃이 예쁘다며 먹기 아까워하는 채설이 가장 마지막까지 접시를 들고 있었다.

 

간단히 요깃거리를 마치고서 작은 꽃나무들과 풀꽃의 길을 거닐었다. 중앙에 있을 모란정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사계절 온갖 꽃이 피어있는 중에 이쪽 길은 봉오리가 더 많았다. 길을 따라 걸어갈 거란 예상과 달리 요괴들은 주변 풀밭에 앉아 들꽃을 보았다.

 

봄 가을에 피는 꽃들로 머리를 장식해주던 흑요에게 채설이 같은 꽃을 꽂아준다. 한 손에 꽃줄기를 든 채우가 둥근 눈을 휘며 웃더니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셋이서 속닥이는 걸 몇 발자국 떨어진 자리에서 보고 있자 쌍둥이가 키득거리며 다가와 무언가를 쥐여준다.

 

백란과 유단의 손에 풀꽃반지가 놓였다. 얼떨결에 같은 것을 들고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은 낯간지러운 기분에 획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던 도씨가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나무를 치며 웃는 도씨의 웃음소리에 근처 요괴들이 돌아보기까지 한다.

 

"으하하- 아이고, 어린애도 아니고. 웃다 숨넘어가게 생겼다."

"그만 웃어!"

 

유단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도씨는 옆에 선 백란이 가만히 지켜보자 웃음을 멈췄다. 도씨가 눈치를 살피며 어색히 웃었다.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요괴들 웃음소리가 뒤따라 섞여든다. 놀림감이 된 기분에 인상을 구겼다. 멀리서 유단과 눈이 마주친 요괴들이 저들끼리 뭐라 쑥덕인다. 술주정뱅이들이 험담이라도 하나. 무시하려던 차에 요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늘에 꽃잎이 날았다. 호탕한 웃음소리에 맞춰 봉오리를 틔우고 노란 꽃이 열린다. 술잔에 튀는 물방울에 나뭇잎은 더욱 선명해졌다. 덩실거린 부채질로 하늘과 나무에 꽃이 피고 새로운 풀이 돋아나는, 만개하는 세상이 있었다.

 

유단은 맑게 퍼지는 꽃향기와 풀내음 속에 놀란 눈을 했다. 감탄인지 모를 짧은 탄성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춤추며 내리는 꽃잎은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머물다 지나갈 뿐이었다. 감탄하는 유단과 다른 이들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춤추고 웃던 요괴들은 뿌듯한 얼굴로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그냥 술주정뱅이가 아니었네."

"이곳의 초목을 가꾸고 꽃을 피우는 화객입니다. 저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그 자체로 부정을 물리는데 탁월하죠."

 

여우는 언제나의 평온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웃음 값으로 치라더군요. 멀찍이 있던 화객들 대화까지 엿들었나보다. 백란은 가벼이 펼쳐낸 부채에 쉽사리 꽃잎을 모아 올렸다. 무슨 요령이 있는 건가. 꽃잎을 바라보던 여우는 제 앞으로 모아든 것을 내밀었다. 왜, 받으라고? 미처 목소리를 내기 전에 엷게 웃은 여우가 부채를 움직여 꽃잎을 날려버린다. 유단은 고개를 내저었다. 볼에 닿는 것들을 손으로 치워내며 내리는 꽃 사이에 환한 빛처럼 서 있는 여우를 노려본다.

 

"술 취했어?"

"저를 뭐로 보시는 겁니까. 겨우 저런 것에 취할까 봐요."

 

그런 것치곤 장난까지 치며 은근히 기분 좋아 보인다. 술이 아니라면 화객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었나. 뭐… 즐거워 보이니 됐다. 화객들이 먼저 갔으니 앞길은 모두 피어있겠죠. 마저 가실까요. 풀밭에 앉아 있던 이들이 옷을 털어냈다.

 

산책로 같은 길을 쭉 걷다 보면 탁 트인 연못과 가운데를 가로지른 다리가 보였다. 그 너머로는 물가를 빙 둘러 자란 큰 벚나무들이 서 있고 그 곁으로 정자가 하나 있었다. 마침 텅 비어있네. 저기 자리 잡으면 구경하기 좋게 생겼다. 유단이 제안하자 요괴들도 찬성했다.

 

다리에서 보이는 연못은 벚꽃잎이 가득 떠다녔다. 푸른 연못에 바람마다 꽃잎이 작은 파문을 일며 하얗게 일렁인다. 발을 붙잡는 광경에 다들 잠시간 그렇게 서 있었다.

 

가려져서 몰랐는데 정자 뒤편으로 모란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누가 봐도 여기가 모란정원이군. 그런데 이만큼 높게 자라는 건가. 여태 모란이라고는 가게 뒤뜰에 있는 것 외에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그건 높이 자란 것도 가슴까지 밖에 안 왔다. 반면에 이곳은 도씨와 유단도 가려질 만큼 훌쩍 자란 나무들이 주먹보다 큰 꽃송이를 피웠다.

 

"크흠, 천호님 저 아는 얼굴이 보여서 잠깐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오라버니, 또 술에 잔뜩 취해 오시려고요."

"누이, 내가 뭐 항상 술만 마시는 줄 알겠어. 인사만 하고 온다니까. 인사만."

"아하, 그럼 제가 따라가도 상관은 없겠지요? 천호님, 저도 인사 좀 드리고 오겠습니다."

 

도씨가 다소 부자연스러운 헛기침을 하다 구렁이 요괴와 함께 나섰다.

 

"저기 약재상이야! 어디 있나 했더니 다들 이쪽에 있었네!"

"와, 마침 잘 됐다. 저희도 저기 둘러보고 올게요."

"둘이 있을 시간도 있어야지."

"그럼 이따 봬요!"

 

쌍둥이마저 힘차게 벚나무 길 쪽으로 가버린다. 순식간에 여우랑 둘만 남겨졌다.

 

"이런 배려는 안 해줘도 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들릴 곳이 있었는데요."

"어디?"

"초대를 받았으니 정원의 주인께 얼굴을 비춰야지요."

 

이 꽃밭 주인? 다른 요괴를 만나서 할 얘기도 없고 딱히 대면하고 싶지 않다. 백란은 작게 흔들던 부채를 접고는 유단 쪽을 돌아봤다. 의사를 묻는 태도에 유단은 정자에 걸터앉았다.

 

"다녀와."

"혼자 계실 수 있으십니까?"

 

눈을 가늘게 휘어 웃는 여우가 장난기 가득한 답을 해온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그만 놀리고 가. 백란은 두 번 묻는 일 없이 천천히 정원 안으로 걸어간다. 역시 술에 취했나. 여우가 오늘따라 묘하게 웃음이 많다.

 

 

 

 

익숙지 않은 옷을 신경 쓰며 걸어 다녔더니 조금 피곤했다. 기둥에 멍하니 기대어 흐르는 풍경을 바라봤다. 여기 조용해서 좋네.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큰 나무 그늘이 뻗어 나와 해가 닿는 곳이 없어 적당히 시원했고, 가지를 쓸어내리는 바람에 잎사귀는 파도 소리를 낸다.

 

한적한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웅성거리는 기척이 가까워졌다. 아쉬움을 남기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술병을 들고 웃는 요괴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

 

"어? 저거 인간 아닌가?"

"에이, 요즘 정원에 인간이 어딨어. …어?"

 

깔깔거리던 요괴들 중 하나가 정자에 앉은 유단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아까 전 화객들이나 입구에 있던 요괴들이 놀라지 않던 것과 사뭇 반응이 대비됐다. 뭐야, 왜 이쪽으로 와. 서로 웅성거리던 요괴가 우르르 정자 근처로 모여든다.

 

"세상에나, 정원에서 인간을 보는 게 얼마 만인고."

"아직 정원 어르신 얘기가 속세를 도는 가보군. 자네, 동행은 누구신가."

 

귀찮다. 어째서 요괴는 인간을 보면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거지. 자문하지만 답은 간단했고 이미 잘 알았다. 저들을 볼 수 있는 이는 어떤 식으로든 흥미로우니까. 유단의 주변에 모여든 요괴가 하나같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괴들에게서 기어이 대화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말해줄 때까지 여기 있을 모양이다.

 

"여, 아니지. …천호."

 

여우라고 말할 뻔했네.

 

"뭐라?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그 천호님을 말하는 겐가?"

"그럼… 그 누명을 벗었다던!? 소문의 그 인간?"

"옳거니! 천호님의 정인이라는 그 인간이구먼."

​"아! 그 소문 속의 인간이로구나."

"천호님과 함께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도와준다지?"

 

그 인간, 그 인간. 그래, 내가 천형죄인 누명 벗은 인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연애한다는 얘기는 또 언제 퍼진 거지. 왁자지껄 대답을 기다려주지도 않고 이어지는 수다스러움에 정신이 없다. 제 할 말만 하고 서로 대화가 통하는지도 모를 것들이 한 차례 지나가자 이제는 끄덕거리면서 뭔가 납득한다.

 

"천호님이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다더니 이래서였군. 여기가 연인이랑 같이 오긴 딱 이지."

"정원의 기운이라면 인간들도 받아들이기 쉽고 말이야."

"헌데 자네는 어디가 안 좋아 여기 앉아만 있는가? 천호님은 어디 가시고."

"남들 다 뛰노는 때에 이리 있는 것을 보니 필시 몸이 안 좋은 걸테지."

"내 약을 지어드릴 수 있네. 소싯적에 전국 팔도를 다니며 약을 배워뒀어."

 

그냥 쉬고 있다는 생각은 아예 없는 건가. 대체 이 흐름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싶어서 뒀지만 이러다 죽을 병 걸린 사람으로 만들 거 같다.

 

"그런 거 아냐. 잠깐 기다리는 중이라고."

 

유단이 오해를 정정하자 심각한 얼굴로 각자 소매를 뒤적이려는 요괴들은 그제야 다시 웃었다. 두 번째 대답을 한 순간부터 이 활기찬 요괴들과 대화를 피할 순 없게 됐다. 여우 올 때까지 심심풀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아픈 곳이 없다면 다행일세."

"맞아, 건강이 제일이여. 언제나 조심해야 해."​

"우리 부인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약이 듣지 않아서 큰일이었는데 이 정원 덕분에 그나마 살았어."

"내 형님도 깨끗한 기운만으로 호전되는 게 많아 이곳은 언제나 꼭 들리는 명소 중 하나였다오."

 

요괴들이 하나같이 자기 식구의 어디가 안 좋았는데 여기서 나았다 등등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기 무슨 요괴 요양원인가.

 

"아파서 오는 요괴들이 많았나 봐?"

 

턱을 괴고 이야기를 듣던 유단이 툭 말을 뱉었다. 저번에 채우에게 들었다. 정원의 약을 탐내 싸우는 일까지 생겼었다고. 유단도 이 정원의 꽃이 지닌 효과를 체험해서 알고 있다. 겨우 꽃 몇 송이로 말끔히 피로가 낫는다니. 누구든 한 번 알고 나면 아플 때마다 찾아올 법했다. 그 주인이라는 작자가 지인제로 바꾸지 않았다면 장사치랑 도둑이 판 쳤을 거다. 이전에 들었던 것을 바탕으로 대략 이유를 짐작하는데 요괴들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허허, 우리 말이 좀 부족했나 보구려."

"우리가 말한 이들은 전부 인간일세."

"정원은 인간에게나 더 이롭지. 본디 이 정원은 주인께서 인간이신 반려를 위해 만드셨다오."

 

요괴들이 말하길, 주인은 자신의 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름다운 것을 심었고 건강하길 바라 약이 될 것을 심었다. 그게 모이고 모이다 보니 이렇게 큰 정원이 되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가꾸고 해가 될 법한 것들은 모조리 치워내 정화했다. 조금이라도 오래 함께 살기 위해 공기 한 자락,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저 인간에게 너그러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반려와 함께 오순도순 살던 주인은 여유가 생기니 주변을 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과 연을 맺은 요괴를 보았다. 측은지심이 생긴 주인이 반려와 상의해 화류놀이의 형태로 가끔 정원을 열어주던 것이 시작이었다더라.

 

​우리는 그때 덕을 본 요괴들이지. 고마운 주인께 보답하려고 이 정원에 있다오. 자신들을 그리 소개한 요괴들은 또 이런 얘기를 인간과 나눌 줄 몰랐다며 좋아했다.​

 

"부인은 아무리 몸에 좋은 걸 가져다 바쳐도 버티질 못하더군. 그래서 여기 자주 왔네."

"최 서방도 여기 있다 가면 그 노쇠한 양반이 덩실덩실 걸어 다녔어."

"내 아우는 여기서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면 고 작은 것이 해사하게 웃으면서 형님 형님 하는데-."

 

의형제, 부인, 남편, 친구. 요괴들이 사람과 맺은 연은 다양했다. 주변에 둘러 앉아 모두 돌아가며 자신이 어떤 인간을 좋아했는지, 정원에 함께 와서 보고 겪었던 것들을 재잘댔다.

 

유단은 말없이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타인의 추억에 딱히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저들에게 자신과 여우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만 가라고 찬물을 끼얹지 않은 것은 다만 그 추억을 말하는 요괴들 표정이 신기해서였다.

 

아련하고 슬픈 눈빛을 하다가 금세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어떤 이는 착잡한 표정을 짓고, 툴툴거리는 어조로 말을 내뱉던 요괴는 글썽거리기까지 한다. 저런 식으로 단시간에 여러 감정을 얼굴에 담는 요괴가 새로웠다. 제 여우는 빈말로도 표정이 다양하진 않았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야 훨씬 표정이 늘었으나 그것도 한정되어있다. 나이 먹고 표정근이 굳은 거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도 여우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깨닫는다.

 

"킁, 우리가 주책맞았지. 반가워서."

"하하, 인간이랑 옛이야기 하려니 좋아서 그랬으니 너그러이 봐주시게."

"아이고, 가세. 우리가 더 있다가는 모처럼 휴양 온 이 마음만 불편해질 터이니."

 

정작 대화라고는 얼마 없이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그래도 좋다고 한다. 코를 훌쩍이고,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던 요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이제 우리 할 일 하고 가세."

 

가장 목청 좋은 요괴가 박수를 치며 말하더니 유단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저 건강하시게. 다치지 않길. 아프지 말고. 생면부지의 인간에게 한마디씩 축언을 전한 요괴들이 활짝 웃는다. 순간 머리카락을 헤집는 바람과 함께 꽃잎이 난무한다. 어지러이 흩어지며 불어온 바람에 팔로 얼굴을 가렸다. 나부끼는 소매가 잠잠해져 슬쩍 팔을 내리면 모두 모습을 감춘 후였다.

 

너희도 화객이었구나.

 

유단의 주위로 어김없이 수만의 꽃잎이 내려앉는다.

 

 

 

 

참 시끄럽고 제멋대로인 요괴들이다. 화객이 떠난 자리가 유독 고요하게 느껴졌다. 여우 오려면 멀었나. 정자 안에는 꽃비가 내린 듯 갖가지 꽃잎이 주변에 놓였다. 약간 시선을 돌리면 난간 사이로 머리를 들이민 가지에도 모란이 피었다. 유단은 무릎 위에 놓인 꽃잎을 집어 들었다.

 

인간을 위한 정원이라. 신이든 요괴든 사람과 연을 맺은 이야기들은 의외로 많았다. 당장 가게에 있는 고서만 둘러봐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연이 있는 요괴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건강하라, 아프지 말라던 목소리가 귓가에 남는다.

 

표정은 모두 달랐으나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움을 담았다. 그것은 유단도 잘 알고 있는 감정이었다. 그 요괴들과 연을 맺은 이는 모두 떠났으리라. 사람에게 꽃이 그런 것처럼, 불사에 가까이 산다는 그들에게 인간은 스쳐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도 알고 그들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꽃의 한철과 같은 짧은 순간을 위해 이 정원을 만들고, 그리워하는 그 사람도 아닌데 반가워하며 단편적인 추억을 읊는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유단도 조금은 훗날을 상상해보려 하지만 애당초 자신의 노년 같은 건 잘 상상되지 않는다. 차라리 중학생 시절 나중에 어떤 식으로 죽게 되려나 상상했던 게 더 현실성 높고 생생하다. 자신의 나이 든 모습을 그려보려 해도 뭐 납골당 가기 전까지 여전히 반월당에 다니겠지 따위의 감상만 남는다.

 

그런 것보단 여우가 궁금했다. 그러다 보면 미래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옆에 없을 때 너는 어떤지가 궁금해졌다. 유단은 꽃잎을 놓으며 앞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 아래 가장 환하고 선명한 여우가 사뿐히 발을 딛는다.

 

"그 사이에 화객이 다녀갔나 보군요."

 

아프지 않을 붉음을 등지고, 다채로운 축복 속에 앉은 연인을 바라보며 백란이 다가섰다.

 

"걔네 원래 이래?"

"봄바람이 꽃잎을 부리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나 없을 때 이 여우가 내 얘기를 할까? 안 할 거 같은데. 그럼 떠올리기는 할까? 하긴 하겠지. 나도 그러니까. 강의를 들을 때도 조금 연관 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난데없이 떠오르기도 했고, 가게로 향하는 길이나 게임 앱을 볼 때도 여우가 마음에 들어 하던 것이라면 제 취향이 아니어도 눈길이 갔다. 그리운 이를 향하던 화객들의 표정이 스친다.

 

"봄을 타서 멋대로 감상에 빠져계시는지."

"너희도 좀 바보 같다고 해야 하나. 미련하다고 해야 하나."

"그쪽에게 듣는 것만큼 모욕적인 것도 없네요."

 

서로 이런 얘기는 나눠본 적이 없었다. 유단은 과연 이 천호가 자신처럼 무언가를 떠올릴지, 자길 생각한다면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자신이 볼 수 없을 모습들이 알고 싶어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하고 제 바보 같은 짓들을 떠올리고 있으려나.

 

"어지간히도 대화가 즐거웠나 봅니다."

 

제 말에는 집중도 못하시는 게. 백란은 유단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거둬가며 말했다. 봄볕에 물든 눈을 휘어가며 그 손에 꽃잎을 쥐고 미소 짓는다. 부드러이 일렁이는 눈빛이 어떠한 감정을 담아 맑게 비춘다. 얘가 지금 무슨 눈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알기나 하는 건가. 나 없을 때 이런 표정은 안 했으면 좋겠다.

 

어? 잠깐. 내가 지금, 이거 뭐야.

 

제가 가진 것을 양보하고 싶지 않던, 특별하게 남길 바라는 ​​어린아이였을 때나 느껴본 유치한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느린 자각 속에 열이 돈다. 시리게 빛나는 하늘을 등진 백란은 자신을 응시하는 유단에게로 몸을 숙였다.

 

"무슨 표정을 하고 계시는지 알기나 하십니까."

 

가까운 속삭임에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 보셔도 안 됩니다. 웃음기 어린 숨이 귓가를 간질여 고개를 움츠렸다. 유단은 자신이 시선이 여우의 입술에 닿았음을 깨달았다. 그런 게 아니라고 되받아치기도 전에 먼저 몸을 뒤로 물린 여우는 높이 오른 꼬리를 살랑였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선 싫다 하시던 게 누구였는지. 잊으신 건 아니지요?"

"…내가 뭘 했다고."

 

뒤늦게 반박해봤지만 백란은 태연한 모습을 보인다. 황급히 눈을 돌려 바람 따라 흔들리는 연못을 내다봤다. 마음에 들었던 평화로운 풍경은 그대로인데 자신만이 달라졌다. 툭. 제 손등을 건드리는 손가락에 유단이 고개를 돌리자 시야 가득 다가온 금빛이 보였다.

 

오색의 바람 사이로 입맞춤이 내렸다. 살며시 맞댄 온기가 하얗게 상념을 날려버린다. 잡지 못하던 꽃잎처럼 멀어질 듯 굴더니 이내 다가와 아쉽다며 입을 열기를 재촉한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술 새로 숨을 나눠마시고 내리뜬 눈과 마주하면 무엇도 상관없을 기분이 들었다. 한 뼘의 거리를 두고 모를 수 없을 달큰한 향기가 났다.

 

"…안된다면서. 네가 하는 건 돼?"

"갑자기 아까워져서요."

"허, 여우의 변덕을 누가 알겠어."

"얼굴이라도 식히셔야겠습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반대로 장난스레 눈을 빛내는 백란에 유단은 피식 웃어버렸다. 자리를 옮기자는 말을 어렵게도 한다.

 

"애들이 없어져서 찾는 거 아니야?"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이들이 말입니까?"

"혹시 모르잖아."

"여기 있으면 또 화객들이 올 텐데요."

"얼른 가자."

 

그 녀석들 너무 말이 많아. 앞서 걸어가려는 유단에 백란은 그보다 조금 느긋한 걸음을 뗀다. 유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란이 자연스레 손을 겹쳐 잡았다. 앞서던 걸음이 잠시 멈춰 같은 속도로 맞춰진다.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작은 밀어를 소곤거리는 여우가 하나, 제 귀를 감싸 얼굴을 붉히고 노려보는 인간이 하나. 그 모습은 언제고 정다운 이들의 것이라 정원의 초목은 그리운 과거를 떠올렸다. 새로운 날의 평안을 기원하고, 돋아나는 신록에 풍요를 기도하는 봄. 여린 풀 위를 밟으며 두 인요는 높게 자란 꽃그늘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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